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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열'린사회와 그 적들'
김성호의 논술의 핵심 - 통합교과형 논술 완전 정복
2018년 02월 23일 (금) 09:21:11
   
 

1934년 첫 출간된 포퍼의 『탐구의 논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때를 즈음하여 나치가 득세하면서 유태인인 포퍼가 학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은 꽉 막혀 있었다. 나치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져서,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마침내 1937년, 서른다섯 살의 포퍼는 '달나라 다음으로 먼 곳'으로 여겨지던 뉴질랜드 크리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 대학의 교수직을 얻어서 떠났다. 포퍼는 이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해 오스트리아에 남은 친지들은 대부분 온전치 못했다. 외가 쪽 친척 16명이 홀로코스트 때 목숨을 잃었다. 달나라 다음으로 먼 곳에 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비참한 현실에 대항하여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명저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역사주의의 빈곤』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칼 포퍼(1902 ~ 1994)

칼 포퍼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뉴질랜드에 머무르며 집필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저술이다. 그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역사적 결정주의가 인류를 '닫힌사회(the closed society)'로 이끌었다는 점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열린사회'를 제시한다. 이 책에 따르면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란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 사회를 말한다. 그가 말하는 닫힌사회란 불변적인 금기와 마술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종족사회로서,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제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닫힌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닫힌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에 기초해 있다.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역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 빠져 지내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국가는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또한, 대화보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 믿는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비판
포퍼는 플라톤을 인용한다.  "현명한 자는 이끌고 통치해야 하며, 무지한 자는 그를 따라야 한다."(『열린사회와 그 적들』 171쪽, 칼 포퍼. 이한구 옮김, 민음사) 플라톤은 자격이 갖추어진 지도자가 등장하면 이상국가는 안정적으로 통제된다고 생각했다. 그 지도자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통치권을 발휘해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는 절대적이고 제어되지 않는 권력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민은 지도자보다 무지한 사람들이기에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의 정책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갖고 이상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지도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물론 최선의 통치자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에 있어서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탁월하고 유능한 통치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에 우리의 모든 정치적 노력을 건다는 것은 나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인다."(173쪽)

최선의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플라톤이 독재자의 출현을 갈망한 철학자라는 오명을 받는 이유는 그가 제도에 의한, 다수에 의한 통제보다는 뛰어난 한 사람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토피아적인 시도는 강력한 한 두 사람의 소수 집권적 통치를 요구하며, 필경 독재로 흐를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 비판
이제 포퍼의 비판적 시선은 헤겔과 마르크스로 향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역사주의'가 '유신론적 역사주의' 즉 '선민사상'이라면 현대의 가장 중요한 역사주의는 '파시즘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히틀러의 인종주의에서는 '선민' 대신에 '선택된 인종'이,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서는 '선민' 자리에 '선택된 계급'이 대치된다.

헤겔은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았으며, 국가에다 집단적 '일반의지', '이성', 혹은 '정신'을 부여한다.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고 국가가 민족의 집단정신을 구현한다는 생각은 파시즘의 국가관과 일맥상통하고, 국가 간의 전쟁을 당연시하고, 이기는 국가가 선이라는 생각은 제국주의 사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편, 포퍼는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한결 부드러운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위대한 휴머니스트였음을 인정한다.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와 헤겔판 파시즘은 그 사상적 원천에서는 동일하나 마르크스주의에는 인도주의적 충동이 강렬하게 넘치고 있다고 평가하며, 실제로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류의 역사에 많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수긍한다. 마르크스는 헤겔 우파인 파시스트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사회적 문제 가운데 가장 절박한 문제에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적용하려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가치는 그 노력이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는 사실에 의해 감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전체주의를 위한 또 다른 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 철학이 가진 부정적인 뇌관을 제거해서 그 위험한 폭발력을 감소시키려 한다. 그는 마르크스 철학의 한계가 그 철학의 결정론적 역사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인류의 전 역사로 확대해서 인간의 역사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4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역사적 단계는 생산력과 생산양식의 모순(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 다음 단계로 이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 단계의 생산력과 생산양식의 모순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자본주의 다음 단계에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역사관의 핵심 내용인데 칼 포퍼의 비판은 바로 이 결정론적 역사관에 집중된다. 결정론적 역사관의 핵심은 역사의 진행 과정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인류의 역사는 어차피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 포퍼는 이러한 "사회과학적 예언은 앞으로 닥쳐올 역사적 변화가 어떤 것일까를 알려 줌으로써, 기껏해야 새 역사의 산고를 완화하거나 그 시간을 단축하는 것 뿐"이라고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 비판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결정론적 역사관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이성, 사회를 개혁하려는 인간의 어떠한 의도도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둘러싼 어떠한 논의도 의심도 대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 포퍼는 나아가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과학적 사회주의' 자체도 문제 삼는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자신의 사회주의는 사회의 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이며 이로부터 역사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주장을 과학적 예측이 아니라 예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미래에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분석한 방식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와 현실을 분석하는 역사적 방법론 혹은 예언적 확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름지기 과학이란 구체적 사실에 의한 반증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확언은 예언이거나 기껏해야 사이비 과학에 그칠 뿐이다.

포퍼의 대안 : 비판적 합리주의와 점진적 사회공학
포퍼에 따르면, 닫힌사회와 달리 열린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되는 약속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해법을 찾아나가는 토론과 미세 조정을 통해 오류는 점차 제거되며 사회는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열린사회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인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류는 발전할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제도가 필요하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또한, 열린사회는 이상과 계획(유토피아주의)에 따라 개인들을 억누르고 희생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

포퍼는 열린사회를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라고 정의하면서 열린사회의 최대의 적은 역사주의라 불리는 전체론, 역사적 법칙론, 유토피아주의로 규정한다. 포퍼의 열린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된 사회이며 개인이 그의 이성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사회이다. 이때 자유란 다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 진보의 원천으로서의 자유이며, 권리란 자신의 지배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로 규정된다.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 거창한 이론들이 장밋빛 이상에 심취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던 시대에, 포퍼의 주장은 분명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는 합리적인 이론이었다. 물론 포퍼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열린사회에 대한 주장이 현실에 존재하는 닫힌사회들에 오히려 도움만 주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 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약자들이 강자의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자기주장을 합리적으로 내세워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시민들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혐오하는 포퍼의 의도와 달리, 제 3세계의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들이 포퍼를 내세워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칼 포퍼와 그의 주장이 더욱 깊이 머리에 새겨질 수도 있겠다.

이 달의 미션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확신에 찬 유토피아주의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관용의 범위와 한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아래에 나오는 두 제시문을 읽고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해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규정자수는 없는 문제이나 대략 600~700자 정도로 조리 있게 답해 보자.

[가] 관용(寬容)이란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나아가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과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관용의 범위에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문제를 가리켜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파괴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한다.

물론 합리적 논증과 공중(公衆)의 의견을 통해 불관용을 감독할 수 있다면 굳이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은 합리적 논증을 제시하는 대신 다른 모든 논증을 비난하며, 다른 사람의 합리적 논증에 귀 기울이기보다 주먹과 권총을 사용하여 그에 대응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므로 관용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 또한 보장되어야만 한다. 살인, 유괴 또는 노예무역을 범죄로 간주하듯이 우리는 편협함과 박해를 선동하는 불관용 또한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

[나] 자유주의 사회를 넘어 만민법(Law of Peoples)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그렇지 못한 사회의 시민들을 어느 정도까지 관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군사·경제·외교적 수단을 포함한 정치적 제재 조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 아니라,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도 '만민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민사회의 구성원은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데, 여기에는 시민성의 의무, 즉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포함된다.

자유주의 사회는 우호 관계에 있는 모든 시민과 협력하고 그들을 원조해야 한다. 만약 모든 사회가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하게 내세운다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 적절한 관용을 베푸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설혹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용인할 만한 방식으로 관용을 베푸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종교, 철학, 도덕 등 시민들이 지니고 있는 '포괄적 교리(comprehensive doctrines)'를 존중한다. 이러한 포괄적 교리가 합당한 '정의''공적 이성(public reason)'의 관념에 부합되기만 한다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를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들 사회의 기본 제도가 정치적 권리와 정의의 특정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면, 그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만민사회의 합당하고 정당한 법을 존중하도록 한다면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그러한 사회를 관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비(非)자유주의 사회를 '적정 수준의 사회(decent society)'로 부르기로 하자.

만약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모든 사회로 하여금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요하고, 그렇지 못한 사회에 대하여 정치적 제재를 부과한다면 적정 수준의 사회는 적절한 정도의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회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이는 적정 수준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적정 수준의 사회가 스스로 개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사회들을 만민사회의 선량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들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적정 수준의 사회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는 동시에 다른 사회의 시민들도 존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록 적정 수준의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와 동일하지도 않고 자유주의 원칙을 충분히 구현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사회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는 서로 다른 사회의 시민들이 서로를 존중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만민사회의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논제] : 제시문 [다]와 [라]에 나타난 '관용' 개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시오.

논제 해설
이 문제는 유사점(=공통점)과 차이점을 묻는 기본 유형의 논제다. 큰 틀에서 보면 [가], [나] 모두  '관용'의 원칙이나 필요성에 대해 긍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견해로 나눠지는 것도 분명하다. 각각의 지문의 문맥을 따라가면 모두 일리가 있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히 공통되는 전제를 갖고 있음에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지문에 나타난 예시 상황처럼 자신(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이나 이념, 문화, 제도와 동일하지 않으며 약간은 거슬리는 점도 있는 타자에 대해 열린 사회의 구성원들이라면 어떤 원칙과 태도를 지녀야 할까? 오늘날 세계가 더욱 좁아지고 국가 간 교류가 잦아지는 시대에 이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자문화만을 내세우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상대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상대주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배웠다. 이 문화상대주의 개념을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하면 ‘관용’이 된다.  

이 논제는 학생들이 너무나 쉽게 정답처럼 외워서 답하는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요청한다. 이른바 교과서적이고 상투적인 해답에 안주하지 않고 세심하게 구체적인 상황을 검토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는 바른 길은 공통점을 먼저 찾고 다음에 차이점을 대비하는 것이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서술하라는 문제들은 거의 이렇게 접근하면 된다. 문제에 사용된 제시문들, 문제 상황, 환경이 달라도 마찬가지다. 공통점이 없는 제시문들을 비교하라는 것은 넌센스다. 늘 비교 대상은 특정 주제나 관점에서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비교 대상들에서 교집합에 해당하는 것을 끌어내어 묶어주는 서술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가능하면(지면의 여유가 있으면) 문단을 바꿔 차이점을 서술해 주면 시각적으로도 논지가 명료하게 된다. 무턱대고 요약만 하는 답안들이 많다.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요약은 요약일 뿐, 그 자체가 비교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두 문단으로 답한다면, 첫 번째 문단에서 공통점을 서술하고, 다음 문단에서 차이점을 서술하면 무난한 답안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한 문단의 핵심 논지(=소주제)는 가능하면 두괄식으로 먼저 제시하는 논지 제시방법이 미괄식 표현방법보다 가독성이 높다. 그래서 도식화해서 표현하면 아래와 같은 구성으로 답할 수 있겠다.

공통점 서술 : 두 제시문은 모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각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관은 그 사회만의 고유한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만큼 유일하게 옳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관용의 자세는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며 상호 존중으로 나아가는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차이점 서술 : 하지만 두 제시문은 관용의 범위와 한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제시문 [가]는 무제한적인 관용에 대해 반대한다. 관용의 원칙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불관용에 대해 용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민들의 자유에 기반한 시민 사회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독재자 찬양이나 독재 정권 회귀 시도에 대해 용인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하지만 제시문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국제 사회에서 일부 선진국 사회가 달성한 높은 자유도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일종의 우열의 논리가 되어 상대적 약자에게 굴욕감, 열패감을 유발하며 진정한 호혜평등, 상호존중의 가능성조차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문자 그대로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두 제시문이 고려하는 '관용'은 상이한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는 차이점 또한 드러난다. 즉, [가]가 다분히 한 사회를 지탱하는 정치적,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관용의 범위를 바라보고 있다면, [나]는 문화나 종교, 가치관, 윤리관 등의 더 넓은 범위에서 관용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러기에 [가]가 [나]에 비해 훨씬 엄격하고 민감하게 관용의 범위와 한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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